인도네시아 소식 > 수하르토 (2)

본문 바로가기
  • FAQ
  • 현재접속자 (601)
  • 최신글

LOGIN
인도네시아 사회 전반적인 소식을 전하는 게시판입니다.
문의나 홍보는 사전고지없이 삭제 처리됩니다.

수하르토 (2)

페이지 정보

작성자 beautician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8-10-19 10:40 조회2,448회 댓글0건
  • 목록
게시글 링크복사 : http://www.indoweb.org/463330

본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전대통령 (2)

 


수카르노 축출

1965 4월 군부와 공산당 사이의 긴장이 높아지자 수카르노는 노동자와 농민들을 주축으로 제5의 군대를 만들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제안을 즉각 실행하라며 적극 호응했다. 그러나 그것이 공산당들이 자신들만의 군대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긴 군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군 수뇌부와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해 5월 날조된 길크리스트 서신이 발견되면서 군부가 미국 CIA와 손을 잡고 수카르노를 실각시킬 것이란 소문이 물밑에서 파다하게 번졌다. 수카르노는 이에 대한 우려를 그 후 몇 개월 동안 수없이 반복해 입에 올렸다. 그해 8월 독립기념일 연설에서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가 중국 및 다른 공산국가들과 함께 반제국주의 전선에 나설 것이며 군을 이 계획을 감히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인도네시아의 공산화는 목전에 다다라 있었다.

 

수카르노가 국내외 정치역학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동안 인도네시아 경제는 크게 악화되어 빈곤과 기아가 전국을 휩쓸었고 외채상환 불능상태에 접근하며 사회기반이 속속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는 공산당과 군부, 이슬람이라는 세 개의 기둥이 받치는 플랫폼 위에 위태롭게 올라앉은 형국이었는데 이들 중 군과 민족주의자 및 이슬람세력들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급속한 성장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던 중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인도네시아는 곧 공산국가가 될 것이라고 그들은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카르노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196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전국 3백만 명의 당원들을 보유했고 특히 중부 자바와 발리에서 맹위를 떨쳤다. PKI는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명실공히 가장 강력한 정치 정당이 되어 있어다.

 

그러다가 1965 10 1일 새벽 미명에 6명의 육군장성들이 대통령 경호처, 디포네고로 사단, 브라위자야 사단의 군인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대통령궁 앞을 포함한 독립광장과 국영라디오방송국, 통신센터 등을 장악했고 그날 아침 7 10분 대통령 경호처의 운뚱 빈 샴수리(Untung Bin Sjamsuri) 중령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CIA의 사주를 받은 일단의 장군들이 수카르노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준비한 쿠데타 시도를 ‘9 30일 거사’로 사전에 좌절시켰다고 발표했다. 9 30일 쿠데타가 진행되며 군 수뇌부 장성들이 속속 살해당하는 동안 가장 강력한 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수하르토가 어떠한 위해도 입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일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는 훗날 호사가들의 입에서 음모설, 역쿠데타설 등이 오르내리는 원인이 되었다. 수하르토는 그날 밤 화상을 입은 세 살 난 아들 또미를 데리고 육군병원에 가 있던 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곳으로 9 30일 쿠데타의 주축 멤버 중 한 명인 압둘 라티에프 대령(Colonel Abdul Latief)이 찾아왔다. 그는 수하르토 가족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훗날 오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라티에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쿠데타 주동자들은 수하르토를 수카르노의 열성지지자로 간주했으므로 라티에프 자신이 그를 방문해 수카르노를 배신자 장군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납치작전이 임박했음을 알렸다는 것이고 거기서 수하르토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그의 증언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군들의 죽음과 납치 소식을 들은 수하르토는 새벽이 밝기도 전 서둘러 KOSTRAD 사령부로 향했는데 도중에 독립광장에 모인 반란군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지휘소에 도착해 KOSTRAD RPKAD(지금의 KOPASSUS 특전사령부)의 특수부대를 움직여 라디오 방송국을 포함한 전략적 지점들을 탈환했다. 놀랍게도 저항은 매우 미약했으므로 그는 자카르타 도심의 통제권을 신속히 장악했다. 그는 육군 통제권을 손에 넣자 이제 9 30일 쿠데타 세력을 처부수고 수카르노를 보위할 것임을 국영 라디오를 통해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그는 할림 공군기지에도 최후통접을 넣었는데 그곳엔 마침 수카로노와 공군사령관 오마르 다니 장군, 인도네시아 공산당 총재 디파 누산따라 아이딧(Dipa Nusantara Aidit)등이 모여 있었다. 이 최후통첩에 겁을 먹고 수카르노 등이 모두 할림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자 수하르토는 10 2일 할림 진입작전을 시작해 소소한 전투 끝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군기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설익은 쿠데타 시도와, 질서와 치안회복을 위해 수카르노로부터 위임받은 전권을 발판으로 수하르토의 분파는10 2일부터 육군을 완전히 그 통제 하에 두었고 급기야 수하르토 본인이 10 14일에 육군사령관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그보다 앞서 10 5일 수하르토는 살해되어 유기되었다가 수습된 장군들의 시신을 깔리바타 영웅묘지에 매장하는 장례행사를 드라마틱하게 진행하며 전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다.


99B573465BC6CA39429C44

쿠데타 희생자들: 살해된 장성들과 뗀데안 대위

998110465BC6CA3A01687A

체포된 쿠데타의 주역운뚱 빈 삼슈리 중령

 

당시 쿠데타의 주동자들과 그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복잡하고도 편향적인 이론들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육군의 이론은 훗날 신질저 정부의 정론이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오직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군과 이슬람, 카톨릭 학생 그룹 등은 이에 동조해 국내외에서 이 사건이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였으며 인도네시아의 영웅들을 비열하게 살해한 반역행위라고 주장했고 군은 종교적 열정에 휩싸인 민간단체들과 함께 인도네시아 사회와 정부, 군에서 공산당과 좌파 조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 숙청작업은 폭력적이고도 파괴적인 모습으로 시작해 자카르타에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과정에서  50만 명 정도가 살해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정치이지만 사망자가 3백만 명에 달한다는 견해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편 약 150만명 정도가 이 시기에 구금당했다. 이로서 수카르노를 떠받치던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인 공산당이 다른 두 기둥인 군과 이슬람세력에 의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권력투쟁

수카르노는 여전히 군 상당부분과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수하르토는 오히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조신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9 30일 사태이후 18개월 동안 학생들을 선동하고 의회, 미디어의 목소리, 군의 위협이 수카르노를 향하도록 선회시키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정치적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99D8DA445BC6DA6120C292


 

1966 1월 대학생들이 KAMI라는 현수막을 들고서 수카르노 정권에 대한 반대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PKI의 해산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통제를 요구했다. 학생들은 군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으므로 학생들과 수카르토 지지자들과의 충돌이 벌어졌을 때에도 군을 등에 업은 수하르토 지지 학생들은 상대방을 압도했다. 훗날 1998년 학생들은 KAMMI라는 현수막을 들고 나와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했는데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두 사람의 인생이 이 부분에서 묘하게 겹쳐진다.

 

1966 2월 수카르노는 수하르토를 중장으로 승진시켰고 그해 7월 대장 계급장까지 달아주었다. 1966 2월 데모데의 학생 한 명이 사망한 상황에서 수카르노가 KAMI의 해산을 명령하자 그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드디어 수하르토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1966 3 11일 내각회의가 열리던 독립궁으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부대들이 접근하고 있었는데 당시 내각회의에 수하르토는 참석하지 않았다. 위협을 느낀 수카르노는 헬리콥터를 타고 60킬로미터 떨어진 보고르궁으로 몸을 피했는대 그곳에 바수키 라흐맛(Basuki Rahmat) 소장, M 유숩(M. Jusuf) 준장, 그리고 아미르 마흐뭇(Amir Mahmud)준장 등 세 명의 수하르토파의 장군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보고르 궁에서 수카트로를 설득해 수뻐르스마르(Supersemar)라 불리게 되는 대통령 명령서를 받아냈다. 이는 치안유지를  위해 수하르토에게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수하르토에게 무소불위의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 수뻐르스마르 서류를 근거로 수하르토는 다음 날 즉시 PKI의 해산을 명령했고 국회와 정부, 그리고 군에서 공산당 비호세력이라는 혐의를 걸어 수카르노파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각에서 15명의 장관들을 체포했고 수카르노를 압박해 수하르토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새 내각을 구성하게 했다. 그들은 임시국민자문회의(MPRS–국회)에서도 수카르노 지지자, 공산당 지지자들을 일일이 색출해 체포했고 수하르토는 해군 공군 참모총장들과 경창청장을 모두 그의 지지자로 갈아 치운 후 그들을 통해 각 군에서도 독자적이고도 광범위한 숙청작업이 전격 시작되었다.

 

1966 6월 숙청작업이 완료된 국회에서는 막스-레니니즘의 금지와 수뻐르스마르의 인준, 그리고 수카르노의 종신 대통령 지위박탈 등을 포함한 24개의 안건들을 처리했다. 정부는 수카르노의 반대에도 수하르토의 의지에 따라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을 종식시켰고 수카르노가 1965년 탈퇴한 UN에도 다시 복귀했다. 하지만 아직도 군 일부가 수카르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으므로 수하르토는 당장 MPRS에서 노골적으로 수카르노를 실각시키려 하진 않았다. 그는 용의주도했고 인내심을 발휘하는 지혜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67 1월 수하르토가 비로서 군에서 수카르노 분파들을 완전히 제거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자 MPRS는 회기를 열어 수카르노 탄핵을 안건으로 올렸다.  탄핵이 결정되자 1967 2 22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수카르노는 대통력직을 사임할 것이라 공표했고 3 12 MPRS는 그에게 남아있던 나머지 모든 권력마저 모조리 박탈하고 수하르토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 수카르노는 보고르 궁에서 연금상태에 들어갔고 그가 1970 6월 마침내 서거할 때까지 민중들은 그에 대한 소식을 더 이상 쉽게 접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1968 3 MPRS는 수하르토를 5년 임기의 정식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신질서 정부의 출범

수하르토는 수카르노의 구질서와 반대개념으로 빤짜실라 사상에 기반한 신질서사회를 표방했다. 처음엔 빤짜실라가 사이비 종교 같은 성격으로 발전해 갈 것을 우려하는 예민한 이슬람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하면서 수하르토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인도네시아의 모든 조직들이 빤짜실라를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국회결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초등학교에서 직장에 이르기까지 이 빤짜실라 이념을 의무적으로 학습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빤짜실라에 존재하는 일정한 모호성은 수하르토 정권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상대편을 반빤짜실라 세력으로 엮어 공격하는 식의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린 부분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신질서 체제는 드위풍시(Dwifungsi–이중 기능) 정책을 가동시켜 이를 통해 군이 인도네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수하르토는 1968 3월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러 정파들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구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파벌들이란 수하르토를 단지 동류들의 선두주자 정도로 생각하는 군 장성들과 반 공산당 숙청에 참여한 이슬람 종교단체, 학생 그룹 등이었다. 이 시기에 수하르토는 군 장교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개인비서조직’(Aspri-Asisten Pribadi)의 지원을 받았는데 디포네고로 부대 사단장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 같은 이들이 이 조직에 포함되어 있었고 수하르토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정적들을 교묘하게 밀어내고 충성파들에게는 관직이나 금전적 보상을 치하하며  체계적으로 권력을 공고히했다.

 


99C340435BC6CAF60F737299185C435BC6CAF70800E9999B87435BC6CAF813A268

하르토노 렉소 다르소노(), 께말이드리스(-우측), 사르워 에디 위보워()

 

MPRS의장 나수티온 장군이1968년 수하르토의 대통령 권한을 상당히 약화시킬 법령을 도입하려던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수하르토는 1969년 마침내 나수티온 장군을 MPRS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1972년 조기 전역하도록 만들었다. 1967년엔 하르토노 렉소 다르소노(Hartono Rekso Dharsono)장군께말이드리스(Kemal Idris) 장군,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장군 등은 서방국가들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 비이념적 양당제 시스템을 염두에 두고 현존하는 모든 정치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수하르토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서며 눈밖에 나고 말았다. 수하르토는 다르소노를 해외에 대사로 내보냈고 다른 두 사람 역시 다른 먼 나라로 발령을 내버렸다.

 

원래 수하르토와 학생운동권 그룹과의 친밀한 관계는 수하르토 정권이 점차 권위적 색체를 띄고 부정부패가 심해지면서 완전히 틀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966년 학생운동의 원래 리더들(66)들은 정권과 동조하며 성공적으로 정치권에 안착했다. 수하르토는 이후 대선때마다 학생 시위대의 강력한 도전에 부딪혀야 했는데 1971년엔 정권의 정당성 문제(골풋-GOLPUT운동), 1972년엔 따만미니 테마공원의 값비싼 건설, 1974년엔 말라리 사건(Malari Incident)으로 대변되는 외자 지배 문제, 1978년엔 수하르토의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등에 대해 학생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정권은 수많은 학생들을 체포해 투옥했는데 그중엔 도로자뚠 꾼쪼로-작티(Dorodjatun Kuntjoro-Jakti), 아드난 부융 나수띠온(Adnan Buyung Nasution), 하리만 시레거르(Hariman Siregar), 샤흐리르(Sjahrir) 같이 훗날 국가적 인물로 성장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권은 1978 1월부터 3월까지 반둥공대(ITB) 캠퍼스에 군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1978 4월 수하르토는 대학캠퍼스 정상화’(NKK)라는 명령을 발동시켜 학문과 관련없는 캠퍼스의 정치관련 운동을 금지하는 강수를 두었다.

 


99E355465BC6CBF61AA71B99564B435BC6CC151F52BA

말라리 사건

 

1974 1 15-16일 카꾸에이 타나카 일본수상의 방문기간 중 자카르타에서 폭력소요가 발행하자 수하르토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학생들은 일본 자본의 지배력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그 배후에는 군참모차장 수미트로 장군(General Sumitro)의 사주가 있었다. 수미트로는 야심만만한 장군으로 당시 수하르토 측근들의 문고리 권력인 개인비서조직(Aspri= Asisten Pribadi = private assistants)의 발호를 혐오하던 인물이었다. 수미트로가 정권을 흔들기 위해 소요를 부추겼음을 알게 된 수하르토는 그를 해임하고 군복을 벗겼다. 이른바 말라리 사건(마라쁘따카 리마블라스 재누아리/1 15일 사태)라고 불리는 일이다. 그러나 수하르토는 대중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Aspri도 해산시켰다.

 

1980년엔 50명의 대표적 정치인들이 수하르토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빤짜실라를 들먹이는 것을 비난하는 ‘50인 청원’(Petition of Fifty)에 서명했다. 하지만 수하르토는 청원자들의 요구사항에 답하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그들 중 일부는 투옥하거나 활동을 제한시키는 등 압박을 가했다.

 

국내정치와 안보

선거를 요구하는 시민 정치가들의 요구를 달래기 위해 1966년과 1967 MPRS 결정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수하르토 정부는 선거와 국회의 구조, 의무 등에 대한 일련의 법안들을 만들어 1969 11월 긴 협상끝에 마침내 MPRS의 승인을 얻었다. 이 법령은 하원 개념인 국민대표부(국회-Dewan Perwakilan Rakjat/DPR)와 지역 대표들로 구성된 국민자문회의 (Madjelis Permusjawaratan Rakjat/MPR)에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예의 460명 의원들 중 100명은 정부가 직접 지명하고 나머지 의석들은 총선결과에 따라 각 당들이 나누어 가졌다. 그 결과 이러한 제도는 입법 부분에서 자동적으로 의석 태반을 점하게 된 정부가 강력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게 했고 특히 대통령 지명은 따놓은 당상이었으므로 수하르토에게 장기집권의 길을 열린 것이었다.

 


99A551435BC6CC2F195734

자카르타 소재 국회의사당 – 오른쪽 앞이 MPR의사당뒤쪽 둥근지붕이 DPR 의사당

 

수하르토는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배경이 되어 줄 소속정당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원래 예전 수카르노의 정당이었던PNI와 손잡는 것을 생각했지만 1969년 골까르(Golkar-직긍그룹)라 불리던 군 주도의 모호한 비정부조직을 인수하여 이를 자신의 오른팔 알리 무르토포(Ali Murtopo)를 통해 선거조직으로 변환시켰다. 첫 번째 총선이 1971 7 3일 치러졌는데 여기엔 골카르와 2개의 이슬람정당들, 다섯 개의 민족주의 정당들, 기독교 정당들이 참여했다. 골카르는 이념문제가 개입하지 않은 개발이란 정치적 플랫폼을 이용했고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과 교묘한 위협전술을 가미해 전체 투표의 62.8%를 얻었다. 이렇게 새로 구성된 MPR 1973 3월 즉시 수하르토와 술탄 하멩꾸부워노 9세를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의 근원은 그들의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광신과 이념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이 지역의 각 나라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대항할 수 있는 모종의 이념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적 이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져야만 국가적 이념에 대한 지지가 힘을 얻을 것입니다.”

1975년 수하르토와 포드 대통령과의 대화

 


994D1A495BC6CC7A1722D799F6A1495BC6CC7B1FBC2C

PPP와 PDI의 로고

 

1973 1 5일 보다 쉽게 정치권을 통제하기 위해 정부는 네 개의 이슬람 정당들을 강제 합병시켜 PPP(Partai Persatuan Pembangunan -연합개발당)을 만들고 다섯 개의 비이슬람 정당들을 PDI(Partai Demokrasi Indonesia-인도네시아 민주당)으로 통합시켰다. 정부는 이들 정당들의 수뇌부를 조종해 이들이 실질적인 야당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부의 2중대로 남도록 강력히 통제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유력한 국회의원들을 그 직에서 끌어내리는 리콜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빤짜실라 민주주의라고 명명된 이 시스템을 통해 수하르토는 1978, 1983, 1988, 1993, 1998년에 연달아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골카르는 선거때마다 MPR의 압도적인 다수석을 차지했으므로 수하르토는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제를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국가통지권을 굳건히 거머쥐었다.

 

수하르토는 다양한 사회공학적 프로젝트들을 통해 인도네시아 사회를 비정치화된 플로팅 매스로 변화시켜 개발이라는 국가적 사명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는 대규모 재계단체들이 국가운영을 장악하는 코퍼러티즘(Corporatism)과 유사한 개념의 구도였다. 정부는 다양한 사회활동그룹들로 대중들을 분산시켜 정부의 정책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정부는 충성을 맹세하는 공무원 노조인 꼬르쁘리(Korpri - Korps Pegawai Republik Indonesia ) 즉 인도네시아 전국 공공서비스단을 1971 11월에 만들어 1973 2월 인도네시아 유일한 합법 노조인 FBSI(인도네시아 전국노동자연맹 - Federasi Buruh Seluruh Indonesia)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런 후 1975년엔 이슬람 성직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MUI를 설립하였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수하르토 정부는 영향력있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들의 현지 동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른바 중국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정책의 일환으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오직 한 개의 중국어 간행물만을 군대 통제하에 존속하도록 허락하고 중국어 간판을 포함한 중국의 문화적, 종교적 표현물을 공공장소에 노출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중국 학교들은 도태되고 모든 화교들이 인도네시아식 이름을 갖도록 강제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1968년 수하르토는 가정계획(KB) 프로그램을 매우 성공적으로 시작하여 엄청난 인구증가를 억제하면서 개인당 소득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임기 중 남긴 가장 근사한 유산 중 하나는 1972 8 17일 대통령령으로 인도네시아어 철자법을 개혁한 것이었다.


99A952505BC6CCBE123A12998389505BC6CCC0151F77

블리타르에서 벌어진 뜨리술라 작전(그 주역인 와르띠민과 야신 장군

 

수하르토는 군에 기대 가혹한 방식을 불사하며 국내상황을 장악했고 이를 위해 꼽깜팁(Kobkamtib-치안과 질서회복을 위한 작전사령부) 바낀(BAKIN-국가정보조정국)을 조직했다. 지방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수하르토는 종전 지역별 통제시스템을 마을 단위까지 촘촘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확대했고 이를 위해 군의 이중기능(Dwifungsi)이라는 조항을 만들어 군인이 지역단체장을 겸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1969년 당시 전국 주지사들의 70%, 그리고 지역 군수들의 반 이상을 현역 군장교들이 차지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잔당들이 1968년 블리타르 지역에 세운 게릴라 기지를 파괴하는 뜨리술라 작전(Operasi Trisula)를 승인했고 1967년부터 1972년 사이 서부 깔리만탄 지역에서 공산당 PGRS가 주도한 빠라꾸 봉기(Paraku insurgency)를 종식시키기 위해 여러 군사작전의 수행을 승인했다.

 


997F214F5BC6CCFF1CD0B6

1977 하산 디 띠로(Hasan di Tiro)가 주도한 자유 아쩨운동 분리주의자들의 초창기 부대가 석유회사 직원들을 공격하자 수하르토는 소규모의 특수부대를 파견해 해당 단체의 일부를 살해하거나 해외로 도피하도록 만들었다. 수하르토의 특수부대는 1981년 방콕의 돈 무앙 공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하이재킹된 가루다 인도네시아 항공기 납치사태를 성공적으로 종식시킨 작전에도 참여했다. (사진-말년의 하산 디 띠로, 출처: https://www.nytimes.com/2010/06/04/world/asia/04tiro.html)

 

서부 이리안 압병에 대한 국민투표를 1969년 이전에 치르도록 한 1962년 뉴욕협정에 따라 수하르토 정부는 1969 7월과 8월 사이에 이른바 자유선택행동이라는 선거스케줄을 조직했다. 정부는 사르워 에디 위보워가 이끄는 RPKAD 특수부대를 파견해 1963년 인도네시아가 이 지역을 이양받은 후부터 정글에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던 여러 민병대(Papoea Vrijwilligers Korps/PVK)들의 항복을 받아냈고 유숩 와난디(Jusuf Wanandi)가 이끄는 카톨릭 지원자들이 생필품을 나누어주면서 친인도네시아 정서를 함양시키려 노력했다. 1969 3월 지리적 불편과 대중의 정치적 무지를 이유로 국민투표가 1,025명의 부족장들만으로 치러지는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수하르토 정부의 작전은 크게 효과를 발휘해 인도네시아와의 합병이 만장일치로 결의되었고 이 투표결과는 1969 11월 유엔총회의 비준을 받았다.

 

2018. 10. 17.


좋아요 5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목록
인도네시아 소식 목록
  • Total 2,978건 11 페이지
  • RSS
인도네시아 소식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98 인도네시아, 한 달여만에 호주산 생우 수입 재개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11 208
2697 엘니뇨로 인니 산불 계속…연무에 비행기 지연되기도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11 275
2696 인도네시아, 태양광 발전 전력 싱가포르에 수출키로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11 218
2695 인니, 괴상피부병 문제로 중단했던 호주산 생우 수입 재개할 듯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8 186
2694 미얀마 사태도 남중국해도 답보 상태로 끝난 아세안 정상회의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8 134
2693 유엔 사무총장 "글로벌 금융 시스템 균열…개도국 지원 필요" wolf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8 122
2692 호주·중국 총리 회담…"연내 베이징서 시진핑과 정상회담"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7 157
2691 해리스 부통령 "미국, 미얀마 사태 해결위해 압박 계속"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7 146
2690 남중국해 분쟁에 中 "신냉전 안돼"…필리핀 "당사국 주권문제"(…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7 129
2689 남중국해 갈등 속 아세안·中 정상회의…조코위 "국제법 지켜야"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6 164
2688 조코위 "한국은 아세안의 에너지·디지털 전환 주요 파트너"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6 216
2687 윤석열 대통령 부부, 인도네시아 동포 초청 만찬 간담회 [뉴시스…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6 240
2686 '아세안회의' 개최국 인니, 최악 대기질에 석탄발전소 가동 중단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6 178
2685 아세안 의장국 순번서 '쿠데타 정권' 미얀마 배제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6 137
2684 [르포] 아시아 정상들 맞는 자카르타, 테러방지·대기질 개선 안…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5 225
2683 캄보디아 총리 된 훈센 장남, 아세안 정상회의로 외교무대 데뷔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5 145
2682 미얀마 사태·남중국해 갈등 속 아세안 정상회의 개막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5 127
2681 인도네시아 골든비자 도입…개인도 9억원 투자시 10년 체류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4 390
2680 인니 외교부 "아세안·中, 3년내 남중국해 행동준칙 제정 합의"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4 149
2679 관광공사, 인니서 한국 여행 홍보전…"드라마 촬영지 관광 늘어"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4 160
2678 인도네시아, 미·일·호주 등과 대규모 다국적 군사훈련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1 184
2677 '대기질 최악' 인니…대통령이 "탈황시설 없는 공장 폐쇄" 경고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9-01 369
2676 외교부, 인도네시아 외교부에 G80 등 의전용 전기차 기증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31 302
2675 인도네시아 경찰, 중국인 88명 체포…'로맨스 스캠' 사기 행각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31 366
2674 중부발전이 인니서 받은 일본계 PF자금, KB·신한이 대환대출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31 240
2673 포스코, 인니 산업부와 고교·대학에 맞춤형 인력 육성과정 신설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29 214
2672 "히잡서 삐져나왔다"…인니 중학교 교사가 학생 머리 잘라 논란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29 337
2671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바다서 규모 7.1 강진…호텔도 흔들(종합… 비다까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3-08-29 287
게시물 검색

인도웹은 광고매체이며 광고 당사자가 아닙니다. 인도웹은 공공성 훼손내용을 제외하고 광고정보에 대한 책임을 지지않습니다.
Copyright ⓒ 2006.7.4 - 2024 Powered By IndoWeb.Org. All rights reserved. Email: ad@indoweb.org